‘명예’에도 값이 있었다.
오늘날 돈을 지급하는 것을 ‘pay’라고 하는데 이 ‘pay’는 원래 ‘평화’ 즉 ‘peace’를 뜻하는 라틴어 ‘pax’에서 나왔다. 어원적으로 보면 지금처럼 일을 시키고 그 대가로 돈을 지불하거나 물건 값으로 돈을 내는 것이 아니라, 손해를 본 사람에게 값을 지불하여 평화를 유지한다는 뜻이었다.
중세 사람들에게 있어 재물에 관한 개념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당시에는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을수록 어려움에 처하면 언제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어 평판은 곧 재산이었다. 만일 누군가 내 평판을 해치는 뒷담화를 하고 다니면 내 재산을 파괴하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뒷담화 사실을 알게 되면 즉각 그 사람에게 내 무너진 평판을 물어내라고 따졌다. 시비가 커지면 소송을 해서 배상금을 받았다. 당시 법정에서는 명예 손상을 입은 사람의 자녀의 수, 농사 짓는 땅의 크기, 그 동네에서 거주한 년수 등을 기준으로 물어 줄 ‘명예 값’을 계산하는 표까지 비치되어 있었다.
경제인류학자들은 시장경제가 생기기 이전에는 이렇게 억울한 사람의 분을 풀어주는 것이 거래의 주요 목적이었기 때문에 평화, 즉 ‘pax’라는 단어가 ‘pay’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프랑스 옛말에 “계산이 반듯하면 우정도 반듯하게 간다”는 말이 있다. 돈을 서로 명확하게 주고받는 것은 매정한 것이 아니라 좋은 인간관계의 기본이란 뜻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