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부」
도시인으로서 비를 싫어하는 사람은 많을지 몰라도 눈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없울 것이다. 눈을 즐겨하는 것은 비단 강아지와 어린이들뿐만이 아니다. 눈 오는 날에 나는 무기력하고 우울한 통행인을 거리에서 보지 못했다. 겨울에 눈이 내리면 온 세상이 일제히 고요한 탄성을 소리 높여 지르는 듯한 느낌이 난다.
우리는 온화하게 된 마음과 인간다운 색체를 띤 눈을 가지고 이웃 사람들에게 경쾌한 목례를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온 천하가 얼어붙어서 찬 돌과 같이도 딱딱한 겨울날의 한 가운데 대체 어디서부터 이 한없이 부드럽고 깨끗한 영혼은 내려오는 것인지 비가 겨울이 되면 얼어서 눈으로 화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눈은 이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을 덮어줌으로 하나같이 희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 것이지만, 특히 그 중에도 눈에 덮힌 공원, 눈에 안긴 산사, 눈 밑에 누운 무너진 고적 등은 더 흥취의 깊은 곳이 있으니, 그 눈이 내리는 배후에는 알 수 없는 신비가 숨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저 킬레만자로의 눈, 먼 옛날부터 아직껏 녹지 않고 잔존해 있다는 눈을 보지 않고는 눈에 대해 말할 수 없다고 아니할 수 없다. 우리의 눈에 대한 체험은 단순히 눈 오는 밤에 거리를 배회하는 정도에 국한 되는 것이니, 생각하면 나의 백설부란 것도 근거 없고 싱겁기가 짝이 없다 할밖에 없다. - 김진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