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추수제(淸秋數題)」
낮에는 아직도 30 몇 도의 더위가,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의 숨을 턱턱 막는다. 그런데 어느 틈엔지 제일선에 나선 가을의 전령사가 전등빛을 따라와서, 그 서늘한 목소리로 노염에 지친 심신을 식혀주고 있다. 그들은 여치요. 베짱이요, 그리고 뀌뚜라미 들이다.
물론 먼저 훨씬 온 것으로 매미, 쓰르라미가 있지마는 그들은 소란한 대낮에, 우거진 녹음 속에서 폭염에 항거하면서 부르는 외침이라, 듣는 이에게 ‘가을이다’ 하는 기분을 부어주기에는 아직 부족한 무엇이 있었다.
전등을 끄고 자리에 누우니 영창이 유난히 훤하다. 가느다란 벌레 소리들이 창밖에 가득 차 흐른다. ‘아!’ 하는 사이에, 나는 내 그림자의 발목을 디디고, 퇴 아래 마당 가운데 섯다. 저 달이 생긴 뒤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어루만지고 주무르고 꼬집고 하였을까?
내 언제부터 달을 사랑하고 바다를 그리워하고 동경하였던가? 한푼의 에누리도 없는 삼복 더위에 먼 산이 불려 나온 듯이 다가서더니, 아침저녁으로 제법 산들산들한 맛이 소매 속으로 들어온다. 벌레가, 달이, 밤하늘이 유난스럽게 바빠할 때, 이 무딘 마음에도. 먼지 앉은 책상 사이로 기어가는 부지런히 부풀어 오름을 금할 수 없다.
- 이희승(교수. 국어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