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뱃길, 철길, 고속도로, 산길, 들길 이 모든 길들은 그냥 자연현상이 아니라,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 인간의 언어다. 길은 부름이다. 언덕 너머 마을이 산길로 나를 부른다. 가로수 그늘진 신작로가 도시로 나를 부른다. 기적 소리가 저녁 하늘을 흔드는 나루터에서, 혹은 시골역에서 나는 부름을 듣는다. 그래서 길은 희망이기도 하며, 기다림이기도 하다.
길은 우리의 삶을 부풀게 하는 그리움이다. 항혼에 물들어가는 한 마을에 논길, 버스가 오며 가며 먼지를 피우고 지나가는 신작로, 산언덕을 넘어 내려오는 오솔길은 기다림을 이야기한다. 일터에서 돌아오는 아버지를, 친정을 찾아오는 딸을, 이웃 마을에 사는 친구를 부푼 마음으로 기다리게 하는 길.
길은 희망을 따라 우리를 떠나라 하고, 그리움을 간직한 채 돌아오라고 말한다. 산과 들을 일직선으로 뚫은 고속도로에서 인간의 승리감을 느낀다면, 들로 산골짜기로 꼬부라지는 철로에서 삶의 끈기를 맛본다. 두꺼운 돌을 깔아 만든 넓은 로마제국의 길은 세계정복의 힘을 자국내고 있는가 하면, 설악산 암자로 올라가는 좁은 길은 세상을 더나 명상에 잠기려는 마움씨의 자국이다.
이미 잡초에 파묻혀버린 오솔길이 삶의 무상함을 보여주는가 하면, 험한 산의 절벽을 따라 새로 난 길은 삶의 용기를 상징한다. 한 시대에 따라, 한 문화에 따라 길은 애절한 노래일 수도 있고, 시가 될 수도 있다. 그러기에 대도시 네거리에서 복작거리다가도 잠시나마 버드나무 그늘진 시골 길을, 냇물이 돌조각 사이로 흐르는 개천길을 걸어보고 싶어진다.
- 박이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