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곳서 익는 열매」 - 유경환
여름에 무성했던 풀이 자취 없이 사라진다. 마른 잎으로 바람에 꺾여 불려가거나,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가 쓰러지고 만다. 그래도 봄이면 초록으로 다시 퍼진다. 지천으로 돋아서 너른 들을 뒤덮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겨울을 이겨낸 씨앗이, 목숨을 틔워 생명을 올려 보내는 일은 아름답다.
생명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어오는 것은 풀씨만이 아니다. 산열매도 있다. 산열매는 잘 익으면 탐스러운 색깔이 된다. 이렇게 눈에 띠는 색깔을 지니는 것은, 날짐승이나 길짐승에게 먹혀서 멀리 퍼질 수 있도록, 색깔을 스스로 진하게 만들어 입는 지혜다. 그런데 눈에 잘 띄지 않는 색깔로 보이지 않는 곳에 열리는 산열매도 있다.
이런 산열매는 대부분 보잘 것 없이 자잘하여 소박한 모습을 지닌다. 하지만 바로 이런 산열매의 덕에, 산야는 헐벗지 아니하고 짙푸를 수 있다. 가늘고 가늘어도 그런 뿌리들이 서로 얽힌 얽힘에 힘입어, 흙먼지나 모랫바람을 막아낼 수 있다.
잘 보이는 곳의 산열매는 크든 작든, 실하든 실하지 못하든, 날짐승이나 길짐승 심지어는 사람에게도 따먹힌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의 산열매는 그 본성대로 타고난 기능과 역할만 다하는 존재다. 이런 산열매를 몰랐던 내가 나를 다시 본다. 눈썹 끝에 와 닿는 저녁놀도 아울러 본다. 타고난 기능과 역할만 다하는 고귀함에 눈썹이 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