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존재를 그린다는 것」
환영받기 어려운 주인공이 있다. 영광의 이름보다 치욕의 이름으로 더 많이 기억되는 비극의 주인공, 바로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다. 이름 자체가 ‘이즘’의 대상이 된 독특한 경우이기도 하다. 사치와 허영이 정체성이 되어버린 사람, 결단코 만족을 모르는 사람, 과소비에 치명적으로 중독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보라리즘이 되었으니 하는 말이다.
과연 보라리즘은 마담 보바리의 정신을 제대로 구현한 명칭일까. 편견을 내려놓고 이 책을 읽으면 보바리즘은 그녀와 거의 연관이 없음을 깨닫는다. 보바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한 번도 그의 입장이 되어본 적 없으면서 비난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보바리즘’은 그의 고통을 한 치도 제대로 묘사하지 못한다.
교양있는 척하는 사람들은 우아하고 세련되게 욕망을 숨기지만, 책밖에는 바깥세상과 연결고리가 없던 시골마을의 여인 엠마 보바리는 그런 복잡한 페르소나를 길러내지 못했다. 누구에게도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 엠마 보바리. 그 한사람을 지키기 위해 작가 플로베르는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닐까. “마담 보바리, 그건 바로 나야”
외롭고 비참했던 그녀를 온 세상 사람들이 공감하고 아파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글쓰기의 힘이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의 죽음,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자의 슬픔, 아무도 보살피지 않는 고통의 편에 서서 결코 그의 마지막 동지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문학의 아름다움이다.